오늘 새벽은 신비한 시간이었다.
엄마는 새벽 2시에, 나는 5시 반 쯤 눈이 떠져 우리는 각자 기도를 드렸다.
오늘 독서 히브리 11,1-2, 8-19와 마르코 복음 4,35-41은 새삼스러운 구절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르코 복음의 사건, 풍랑 한 가운데서 주무시던 예수님을 제자들이 깨우는 에피소드는
요 며칠 자꾸 눈에 밟혀들어왔던 구절이었다.
아브라함은 목적지를 알지도 못하면서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철저히 믿음과 순종으로 따라 고향을 떠났다.
외동아들 이사악을 통해 후손들이 그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라던 약속을 뒤집는 말씀에도 순종했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면 새로운 아들을 주실 것인지,
아니면 이사악을 다시 살아나게 해주실 것인지에 대해
어떤 보장이나 협상안을 받아내려는 것 없이 그저 순명하였다.
구약의 이 일화는 신약에서 마리아의 무염시태를 생각나게 했다.
마리아님 역시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가지는 것에 대해, 알려지면 돌로 매질당해 죽을 가능성에 대해
어떤 안전의 보장을 받아내려고 하지 않았다.
인간적인 근심과 걱정, 원망이나 의문 대신 그 자리에 놓여진 말은 너무나 겸허하고 고요하다.
'예.'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복음 속 제자들은 풍랑으로 배가 전복될 위기에서 예수님에게 화를 내다시피 한다.
"지금 잠이 옵니까?↗ 내가 지금 죽을동 살동 하는데 걱정도 안 되십니까?"
때때로 인생의 풍랑을 만날 때마다 나 역시 그 분이 잠에 빠져 있다는,
나와는 무관한 영역에서 나의 고통을 방관하고 계시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심지어는 그 분이 나를 이런 고통에 밀어넣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회심을 시작한 후로도 비바람과 파도로 시야가 가려질 때면 여전히
그 분이 나와 한 배를 타고서 나를 지켜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을 때가 있다.
오늘 이른 새벽 나를 깨우신 그 분이 아브라함과 성모 마리아, 그리고 제자들을 보여주며 내게 물으신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지난 주 그렇게 몸살을 앓으며 다시 한번 느낀 내 마음의 벽.
나는 아직도 그 분께 온전히 내어드리지 못했다.
순명한다는 것, 전적으로 그 분께 의탁한다는 것은 여전히 이렇게도 어렵다...
다시 또, 내가 가진 전부를 내어드리고 그 분께 '아멘' 이라고 말씀드릴 기회를 주신다.
주님.
사랑으로 저를 바라보고 계심을, 저의 진화를 계획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제 눈이 당신을 바라보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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